경희궁의 개요, 창건, 역사, 위치, 경복궁 중건 자재로 철거 후 활용
380. 경희궁의 개요, 창건, 역사, 위치, 경복궁 중건 자재로 철거 후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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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경희궁의 개요, 설명, 정의
1. 경희궁의 건축과 서궁
경희궁(경사 慶, 빛날 熙, 집 宮)은 서울특별시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광해군 9년(1617년)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입니다. 서울시에 있는 5대 궁궐 중에서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 불리며,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조선의 이궁(떼어놓을 離, 집 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2. 경희궁의 면적, 전각 등
부지 7만2천8백 평(240,660㎡)에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 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습니다.
3. 철저히 훼손된 궁 경희궁
그러나 5대 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으로서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 몇 채의 전각들을 제외하곤 전부 훼철됐고, 그나마 남아있던 부지 또한 일제강점기에 축소되어 현재 원 상태로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초석과 기단이 남아있고,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잘 보전돼 있어 궁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입니다.
4. 경희대학교의 명칭 유래
일제강점기에 경희궁 부지에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하였습니다. 경희궁 터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었고,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 서울시립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 일부를 복원하였습니다. 서울고등학교의 별칭과 경희대학교의 명칭 등이 여기에서 유래하였습니다.
Ⅱ. 경희궁의 간단한 설명
구 분 | 관 련 내 용 | 비 고 |
명 칭 | 경 희 궁 | |
문화유산 지정 |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 |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 |
분 류 | 유적건조물, 정치 국방, 궁궐 | |
면 적 | 240,660㎡ = 72,800평 | |
지정 일자 | 1980년 09월 16일 | |
건축시기 | 16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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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경사 慶, 덕 德, 집 宮)이었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친 것입니다.
Ⅳ. 경희궁의 역사
1. 조선 시대(창건 이후 ~ 고종 이전)
경덕궁 터는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정원군)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서, 광해군은 임진왜란 뒤 재건된 창덕궁으로 들어가기를 싫어했고, 인왕산 아래 새 궁궐인 인경궁(어질 仁. 경사 慶, 집 宮)을 짓다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그의 집을 빼앗아 1617년(광해군 6년)~1623년(광해군 15) 사이에 경덕궁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경덕궁을 쓰지 못하다가, 인조가 즉위한 뒤에 창덕궁이 소실되고,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마저 불타버리자 인목대비를 받들어 이 궁궐로 이사하였습니다.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하기 위해 인경궁을 철거한 반면, 경덕궁은 인조 아버지의 사저가 있던 곳이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숙종이 태어났고, 숭정문에서는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하였으며, 숙종, 순조가 승하하였습니다.
경희궁은 경복궁 서쪽에 세워진 까닭으로 서궐(서녘 西, 대궐 闕)로 불렸고, 이 밖에도 새문안 대궐, 야주개 대궐, 새문동 대궐 등으로 불렸습니다.
인조는 재위 후 약 9년 동안 경덕궁에서 지냈고, 효종과 현종은 잠시 머무르는 용도로만 사용했을 뿐,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숙종은 남인과 서인 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다루며 경덕궁에서 지내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이후 1760년 영조는 원종의 시호인 경덕(慶德)과 동음이라는 까닭으로 궁궐 명을 경희궁으로 개칭한 뒤 19년 동안 머물렀는데,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죽을 때까지 거의 이곳에서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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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숭정전에서 즉위하였는데 자객의 위협을 받고 궁을 옮겼습니다. 경희궁은 순조 29년(1829년) 10월 화재로 인하여 전각 대부분이 소실된 것을 1831년에 중건하였고, 이후 철종이 약 7개월간 머물렀습니다.
1844년 헌종의 가례 이후 궁궐로서는 활용되지 않았습니다.
2. 경희궁의 폐 궁
고종 초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고 고종이 그곳을 법궁으로 삼아 지내자 경희궁은 왕이 지내지 않는 빈 궁궐이 되었고, 관청의 필요에 따라 창고나 다른 용도로 쓰였습니다.
경희궁은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자재를 모으기 위해 철거되었는데, 1865년에 작성된 경복궁영건일기 에서는,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 사현합,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내인간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습니다. 이날부터 궁궐의 뜰에 깔린 전석, 층계석을 뽑아내어 먼저 광화문 중건하는 자재로 사용했습니다. 라고 적고 있어 1865년 04월부터 08월까지 훼철한 경희궁의 자재로 경복궁 중건하는 데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68년(고종 5년)에는 경복궁 공사를 위해 경희궁 일부 전각들을 허물었고, 경희궁 내 빈터 일부를 밭으로 쓰도록 분배하였습니다. 또한 빈 터를 용동궁, 명례궁, 수진궁, 어의궁의 4개의 궁에 분배했습니다. 곧이어 터에 조폐소, 양잠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이때 양잠소는 1884년 9월 독일인인 마에르텐스(A. H. Maertens)를 고용해 운영을 맡겼으며 1886년에 청나라에서 뽕나무를 수입하여 양잠소를 설치했습니다. 1899년 독일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가 방문했을 때 관명식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1901년에 외국인이 제작한 지도에서는 뽕나무 공원이라 적히기도 했습니다.
비록 훼손을 당하기는 하였으나 이 당시만 하더라도 일부 시설이 유지되며 궁궐의 모습은 지키고 있었고, 광무 6년(1902)에는 경운궁에 연결된 운교를 놓는 등 대한제국 ~ 광무 연간까지는 경희궁의 모습은 유지되었습니다.
다만 1910년 경성부에서 발행한 경성부사에서 남아있는 건물이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뿐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3. 일제강점기
1910년 11월에 조선총독부 중학교(후 경성중학교)가 들어서서, 숭정전을 포함한 일부 전각들이, 학교 용지로 사용되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건물들이 매각되었고, 정전인 숭정전은 일본의 한 불교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 본전으로 쓰기 위해 1926년 남산 기슭으로 이건 되었다가 지금은 동국대학교의 법당인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회상전은 1911년부터 10여 년 동안 일본인의 학교였던 경성중학교의 기숙사(교원 양성소)로 쓰였습니다. 1928년 회상전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사찰에 매각되었다가 1930년 화재로 소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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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정당은 1928년 광운사로 이건 되었으며, 관사대는 사직단 뒤로 이건 되어 현재 황학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흥화문은 1932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의 문으로 쓰였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폐사되고, 이후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 지금의 위치(계양문 : 남문)로 다시 옮겨졌습니다. 본래의 위치는 구세군회관 자리입니다.
1922년에는 경희궁 동쪽 부지에 조선총독부 직원 관사가 들어섰고, 1922년 6월, 경희궁의 동쪽에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부지로 21,500평을 떼어 냈고, 1927년부터 1928년까지 경희궁 남쪽 도로를 확장하면서 경희궁 일부를 도로로 편입시켰습니다. 북서쪽에는 1932년 경성측후소가 건설되었고, 1940년대에는 대동아 전쟁에서 미군의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방공호가 숭정전 동쪽 행랑에 건설되었습니다.
4. 광복 이후
경희궁 터는 광복 후에 서울 중⋅고등학교로 쓰이다가 1980년 6월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용도가 변경되었습니다.
1978년에 현대건설이 부지를 매수하여 사옥을 조성하려 하였으나, 공원 녹지를 조성해야 한다는 여론에 서울특별시가 재매입하여 사적 제271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이후 복원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서울시의회에서 경희궁 복원 비용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복원 공사는 중지되었습니다. 서울시에서 경희궁 터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세우면서 다시 훼손되었습니다. 창건 당시의 경희궁 규모는 무덕문지(북문)의 유구가 발견된 대한축구협회, 성곡미술관, 일조각출판사, 내수동교회, 구세군회관, 서울시교육청, 서울복지재단을 모두 경희궁에 지었으며, 기상청 서울관측소 일부도 포함됩니다.
또한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일대가 경희궁 추정 궁역으로, 동쪽 매각 용지는 광화문 풍림스페이스본아파트 104동 일부, 축구회관, 성곡미술관, 아산정책연구원, 경희팔레스빌리지, 범한서적, 사우디아라비아대사관, 한국관광연구원, 서울시교원단체연합회, 교보생명보험 직장보육시설, 체코대사관, 세종로복지센나, 메트로신문사 등의 건물이 들어서있습니다.
2013년 01월, 서울특별시청과 종로구청은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고, 제출된 계획은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 공동으로 2014년부터 2023년까지 경희궁 2차 복원이 진행되는 것을 소재로 하였습니다.
정문인 흥화문을 원위치로 복원하고, 방공호를 철거한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 또한 서울시립 경희궁미술관을 철거한 후 흥정당을 복원하며, 현재 성곡미술관 주변에 남아있는 궁장을 포함하여 경희궁 궁장이 일부 복원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2단계에서는 서울역사박물관 이전과 궁지 내 민간 건물 매입이 추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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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에 서울시립미술관을 철거하였으며,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을 과거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던 위치에 새로 조성하고 기존 주차장 자리는 발굴조사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Ⅴ. 국가유산청의 경희궁 설명
1. 경희궁의 본래 이름은 경덕궁
경희궁(경사 慶, 빛날 熙, 집 宮)은 조선 15대 광해군 대에 이궁(떼어놓을 離, 집 宮)으로 창건한 궁으로 원래 이름은 경덕궁(경사 慶, 덕 德, 집 宮)이었습니다. 원래 이곳은 16대 인조의 아버지 추존 원종(정원군)이 살던 사저였는데, 경덕궁이 지어지면서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서녘 西, 대궐 闕)이라 불렸습니다. 1760년(영조 36)에는 원종의 시호와 음이 같다 하여 궁의 이름을 경희궁으로 바꾸었습니다.
2. 경희궁의 주요 전각 등
주요 전각으로는 정문인 흥화문, 정전인 숭정전, 편전인 자정전, 그 밖에 생활공간인 융복전, 회상전 등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인조 대부터 철종 대까지 많은 왕과 왕비가 생활하였는데, 특히 경종, 정조, 헌종이 숭정문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3. 고종 때 경복궁 중건 자재로 활용
그러나 1865년(고종 2)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면서 대부분 전각이 경복궁 복원에 사용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학교가 지어지면서 일부 남아있던 전각들이 철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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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87년부터 서울시에서 경희궁 복원사업을 진행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