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의 개요, 창건, 역사, 위치, 덕수궁의 독특한 서양식 건물들
381 덕수궁의 개요, 창건, 역사, 위치, 덕수궁의 독특한 서양식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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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덕수궁의 개요, 설명, 정의
1. 덕수궁의 명칭의 여러 경로
덕수궁(덕 德, 목숨 壽, 집 宮)은 서울 중구 정동(곧을 貞, 골 洞)에 있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궁궐로서,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본래 이름은 경운궁(경사 慶, 돌 運, 집 宮)으로, 아관파천(1896년 02월 11일~1897년 02월 20일까지 01년 09일간 조선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어가를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옮겨서 파천한 사건) 이후 환궁하여 법궁으로 사용되다가 순종 즉위 후 궁의 이름을 현재의 덕수궁으로 변경하였습니다.
현재의 영역 외에 선원전, 홍원, 중명전 영역도 덕수궁의 영역으로 모두 이어져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습니다.
2. 덕수궁의 전래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주었고, 이후 수빈 한씨의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고,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습니다, 1623년에는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습니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서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9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905년 다시 중건했으며, 1906년엔 대안문(큰 大, 편안할 安, 문 門)이 수리된 뒤 대한문(큰 大, 한수 漢, 문 門)으로 개칭하게 됐습니다. 1907년(순종 1)엔 순종이 즉위 후 궁호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개명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궁궐의 범위가 대규모로 축소되고 전각들이 대부분 훼철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Ⅱ. 덕수궁의 어원
덕수(덕 德, 목숨 壽)는 덕이 높고 오래 산다. 라는 뜻으로,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며 아버지인 고종에게 장수를 빌며 내린 궁호입니다. 상왕의 궁에 관례적으로 붙이던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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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덕수궁은 아니지만, 같은 이름의 다른 덕수궁은 조선 초에도 있었는데, 양위한 태조의 소어궁(바 所, 어거할 御. 집 宮)도 정종이 개성에 건립한 뒤 이름을 덕수궁이라 했습니다. 그 후 태종이 서울로 재 환도하여 지금의 창경궁 부근에 태조의 궁을 세웠을 때, 같은 이름인 덕수궁이라 하였습니다.
즉 고종과 마찬가지로 생전에 양위한 부왕의 궁에 덕수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송나라에도 같은 이름의 궁이 있었습니다.
Ⅲ. 덕수궁의 간단한 설명
구 분 | 관 련 내 용 | 비 고 |
명 칭 | 덕 수 궁 | |
문화유산 지정 |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 |
소 재 지 |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99(정동) | |
분 류 | 유적건조물, 정치 국방, 궁궐 | |
면 적 | 67,048㎡ = 20,282평 | |
건축 시기 | 조선 초기 이후 계속 |
Ⅳ. 덕수궁의 역사
1. 조선 초기
현재 덕수궁 자리에는 본래 1469년(예종 1년) 남이의 옥에 연루된 조영달의 집이 있었고, 왕실은 조영달이 역모에 연루된 까닭에 그 집을 몰수하고, 그로부터 1년 뒤인 1470년 성종이 즉위한 뒤 세종의 막내아들이자 적8 남인 영응대군 이염의 처 송씨에게 하사하였습니다. 이듬해 송씨가 이 집을 왕실에 바치자 이름을 연경궁(끌 延, 경사 慶, 집 宮)으로 지었습니다.
1472년(성종 3년) 12월에는 성종의 생부인 의경 세자 이장의 묘인 의묘(아름다울 懿, 무덤 廟)를 연경궁 후원에 세우고, 의경 세자의 장남으로 제사를 지낼 월산대군에게 연경궁을 하사하였습니다.
의경 세자가 20세에 죽고 그의 부인이자 성종의 생모인 수빈 한씨(인수대비)가 왕대비가 되어 입궁한 까닭에 월산대군이 오롯이 연경궁을 소유하게 되었고, 1475년(성종 6년)에 의묘의 위패를 경복궁 안의 연은전(끌 延, 은혜 恩, 큰집 殿)으로 옮기게 되어 연경궁은 월산대군 개인의 집이 됩니다.
월산대군이 사망한 지 104년이 지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했다가 1593년 10월 4일에 환궁하는데 한양 내 모든 궁궐이 소실된 까닭에 선조는 과거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연경궁을 고치고 주변의 여러 가옥과 대지를 궁궐의 역으로 합친 뒤 임시 거처지인 시어소(때 時, 어거할 御, 바 所)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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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정릉동에 있다 하여 정릉동 행궁 또는 정릉 행궁이라 불렸습니다. 정릉 행동과 소공동 부근은 왜장들이 한양을 점령했을 때 주둔했던 장소이기 때문에 임금이 오랫동안 거처하기에 부적합한 장소로 여겨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른 궁궐로의 환궁을 염두에 둔 임시거처로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정릉 행궁의 규모가 협소한 까닭에 선조는 창덕궁의 중건을 지시함과 동시에 주변의 민가를 매입하여 궁궐의 역에 포함하도록 지시하고, 선조는 이후 창덕궁이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608년 석어당에서 승하합니다.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도 정릉 행궁 즉조당에서 즉위했습니다.
2. 경운궁 시기
1611년 11월 15일(광해군 3년 음력 10월 11일) 창덕궁으로 이사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경사 慶, 돌 運, 집 宮)이라 이름 지으며 비로서 왕궁이 되었습니다.
광해군이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 하게 된 것은 1615년 음력 04월이었으며, 창덕궁, 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 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 유지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1623년 음력 3월 서인(西人) 이귀, 최명길 등이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을 추대하고 인조반정을 일으켜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이 인조로 등극하고, 인조는 경운궁 별당에 행차하여 인목대비를 만나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이 궁에서 거처하지 않고 08일 후 인목대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옮겨가고, 그해 음력 07월에는 선조가 침전으로 쓰던 즉조당과 석어당의 두 건물을 제외하고 30년간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 대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 주므로서 경운궁은 두 채의 건물만 남긴 채,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다.
그 후 영조는 1773년(영조 49년), 선조의 환도어거 180주년을 맞이하는 해의 02월 21일(음력 2월 1일) 세손(후의 정조)과 함께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선조의 고생을 회상하면서 사배례를 행하였습니다.
3. 경운궁이 법궁으로 변모합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시해당한,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고종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세자와 함께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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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아관파천으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1896년 02월 16일에 경운궁의 수리를 명령하고, 05월에는 경운궁 대유재 등에서 고무라 주타로를 만나는 등 경운궁에서 종종 외교활동을 하였습니다.
1897년(건양 2) 2월 20일 고종은 아관파천을 멈추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합니다.
경운궁은 원래 법궁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까닭에 그 입지가 매우 좁았으므로, 조정은 경운궁 주변의 토지를 매입해 경운궁으로 편입시키고자 하였으나, 이미 덕수궁에 영국공사관, 미국 공사관, 독일 공사관이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영역을 넓히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1897년 09월 17일에는 고종의 황제 즉위식이 있어 우선 소공동의 원구단에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이날부터 이 궁은 대한제국의 정궁(정할 正, 집 宮)이 되었으며, 연호를 광무(빛 光, 국셀 武)라 하였습니다.
4. 일제강점기
1910년(융희 4)에는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이 준공되었으나, 이미 국권은 일본 제국에 넘어간 후였습니다. 1912년에 종로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직선도로인 태평로(현 세종대로)를 만드는데, 도로의 영역과 덕수궁의 영역이 겹치는 부분이 있었고, 이에 조선총독부는 동쪽 궁벽을 허물고, 그 근처에 있던 궐내 각사 건물도 허물었습니다.
이때 대한문도 당시의 위치에서 뒤로 옮겨졌고, 1919년에는 덕수궁에서 머물던 태황제 고종의 사망 이후 덕수궁은 궁궐의 어떠한 기능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고종 승하 후 1920년에는 미국 공사관과 덕수궁 사이에 덕수궁길을 냅니다. 그리고 1926년에는 창덕궁에서 순종이 사망한 후 구세군에 필지를 내어주게 됩니다.
5. 광복 이후
6.25 한국전쟁 이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석조전에서 개최된 바 있으며, 당시 석조전이 불타서 그 후 복구하여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다가 왕궁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Ⅴ. 덕수궁의 궁역 및 전각
덕수궁의 전체 영역은 현 덕수궁 권역, 선원전 및 홍원 영역, 중명전 영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현재 덕수궁에는 정문인 대한문,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침전인 함녕전과 준명당, 즉조당, 덕수궁 내에서는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 그리고 정관헌, 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있는데, 덕수궁은 특히 서울에서 제일 먼저 근대 유럽의 고전주의파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진취적 궁궐입니다.
Ⅵ. 대한문(큰 大, 한수 漢, 문 門)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이었습니다. 1904년 화재 이후 1906년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을 1904년 04월 25일 대한문으로 이름을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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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청 앞 광장 쪽으로 동향하고 있는 현재의 대한문은 잦은 도로 확장 등으로 위치가 여러 차례 옮겨졌습니다. 원래 위치는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이었다고 합니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다포식 우진각지붕으로 공포가 화려합니다. 2021년부터 현 위치에 일제강점기 시절 훼철된 월대를 복원하는 공사에 들어갔고,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세 번씩 왕궁 수문장 교대 의식이 치러지며, 한국어를 비롯해 일본어, 영어 등의 외국어로 교대 의식에 대한 설명방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Ⅶ.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덕수궁에 대한 설명 자료
1. 덕수궁에 대한 설명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습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 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 부터입니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고 불렀고,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입니다.
2. 조선 말기의 덕수궁
조선 말기 정국은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개화 이후 물밀듯 들어온 서구 열강들이 조선에 대한 이권 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입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아관파천)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로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혀 정국을 주도해 나가고자 한 고종의 선택이자 강력한 의지였습니다.
대한제국의 위상에 맞게 경운궁 전각들을 다시 세워 일으킨 것도 이과 같은 맥락이며, 고종 당시의 덕수궁 권역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역의 3배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3. 고종의 생각과는 다른 열강들
그러나 고종의 의지와 시도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1907년 고종은 결국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납니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의 이름을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되었습니다. 고종은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으며, 덕수궁은 고종 승하 이후 빠르게 해체, 축소되었습니다.
4. 근대 문물과 덕수궁
개항 이후 서구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정동 일대로 모여들면서 덕수궁도 빠른 속도로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덕수궁과 주변의 정동에는 지금도 개항 이후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교회와 학교, 외국 공관의 자취가 뚜렷이 남아있고, 덕수궁이 다른 궁궐들과 달리 서양식 건축을 궐 안에 세운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5. 덕수궁의 독특한 건물
덕수궁의 독특한 건물 중, 함녕전 뒤편에 있는 정관헌은 전통식 지붕 구조와 서양식 기둥 양식이 절충된 건물이고, 석조전은 내부와 외부가 모두 서양식으로 꾸며진 건물입니다. 이처럼 덕수궁에 여러 서양식 건물이 남아있는 것을 통해 고종이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6. 2024년 현재 덕수궁 권역
현재 덕수궁 권역은 고종 당시의 궁궐 면모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덕수궁에는 저마다 사연을 안은 유서 깊은 전각들이 오순도순 자리하고 있고, 석어당에서 석조전에 이르는 뒤쪽에는 도심의 번잡함을 잊게 하는 호젓한 산책로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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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근대사의 자취를 기억하는 덕수궁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산책로인 정동길과 더불어 도심의 직장인과 연인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