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의 개요, 창건, 역사, 위치, 일제강점기 창경원으로 격하, 건축물 등
379. 창경궁의 개요, 창건, 역사, 위치, 건축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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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창경궁의 개요, 설명, 정의
1. 창경궁의 본래 명칭은 수강궁
창경궁(창성할 昌, 경사 慶, 집 宮)은 서울특별시에 있는 궁궐로 조선 성종(1483년) 때에 건축하였고,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 장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국새를 넘겨받은 수창궁(목숨 壽, 창성할 昌, 집 宮)의 청심정(맑을 淸, 마음 心, 정자 亭)과 동일한 이름의 정자를 가까이하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창덕궁과 함께 동궐(동녘 東, 대궐 闕)이라고 하였는데,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붙어, 있으며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경궁의 원래 이름은 수창궁(목숨 壽, 창성할 昌, 집 宮)과 매우 유사한 수강궁(목숨 壽, 편안할 康, 집 宮)으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것입니다.
2. 수강궁에서 창경궁으로 명칭 변경
성종 14년(1483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새로 중건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습니다. 창경궁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을 처형한 일과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 정조가 승하한 일 등 크고 작은 궁중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3. 일제강점기에는 창경원으로 명칭 변경
일제강점기에 동물원과 식물원, 이왕가박물관이 들어서고, 이름도 창경원(창성할 昌, 경사 慶, 나라 동산 苑)으로 격하되는 등 수난을 겪었습니다. 1963년 1월에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고, 1983년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이름도 창경궁으로 되찾았습니다.
Ⅱ. 창덕궁의 간단한 설명
구 분 | 관 련 내 용 | 비 고 |
명 칭 | 창 경 궁 | |
문화유산 지정 |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 |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와룡동) | |
분 류 | 유적건조물, 정치 국방, 궁궐 | |
면 적 | 216,774㎡ = 65,574평 | |
지정 일자 | 1963년 01월 18일 | |
건축시기 | 14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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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창경궁의 역사
1. 조선 초기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 거처한 궁)이 있던 곳입니다. 성종 15년(1484년)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확장하여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궁입니다.
세 사람을 위하여 따로 지은 대비궁, 경복궁, 창덕궁의 남향 배치와 구분하려고 동향으로 배치하였습니다. 성종 때에는 정전인 명정전, 편전인 문정전, 침전인 수령전 그리고 환경전, 경춘전, 인양전, 통명전, 양화당, 여휘당, 사성각 등이 건립되었으며, 궁의 둘레는 4,325척(1,310m)입니다.
2. 임진왜란 이후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고, 광해군 즉위 초부터 중수가 진행되어 정세가 어수선하여 일시 공사가 정지되었다가 광해군 7년(1615년) 4월에 왕이 정릉동 행궁에서 창덕궁으로 다시 거처를 옮기면서 신하들의 반대 속에 창덕궁 영건의 공사에 다시 착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주요 건물들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1616년 11월에 마무리되었습니다.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에는 창덕궁의 부속 궁궐로 활용되었으므로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로 불렸습니다.
창경궁 재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어 법궁이 됨에 따라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으나, 창덕궁과 인접한 관계로 조선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되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창경궁은 잦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하였는데, 인조반정 후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 환경전, 양화당 등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난이 진정된 후 1619년에 다시 중수되었다가 순조 때 화재로 다시 훼손되었습니다.
숙종 때에는 신사년의 변고와 신임년(신축년과 임인년)의 사화가 일어났습니다. 숙종은 장희빈을 총애하다가 장희빈이 숙종의 계비 민씨를 신사년 701년에 희빈을 처형하고 그의 일가를 숙청하였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궁내의 취선당에 거처하였습니다. 신축년(1721년)과 임인년(1722년)에는 왕세자의 즉위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다가 노론의 대신들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 동궁 처소를 중심으로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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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때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사건이 창경궁에서 일어났고, 당시 세자가 갇힌 뒤주는 궁내 선인문 안뜰에 있었습니다.
3. 일제강점기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급속히 변형되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되었습니다. 1909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마음을 달랜다는 이유로 강제로 창경궁 내부 궁문, 담장, 많은 전각을 훼손하고 궁 안에 일본식 건물을 세우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유원지로 조성하였습니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일제는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습니다.
1911년에는 자경 전터에 2층 규모의 이왕가박물관을 새로 지었으며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변경하여 격하하였습니다.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창경궁 장서각을 건립하였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 숲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창경원으로 전략하면서 대부분 건물이 철거, 훼손되었습니다. 또한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가르는 도로는 1912년 일제가 계획하였으나,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하여 건설이 미루어졌고,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공사가 강행되어 1932년에 도로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의 발굴, 복원 공사로 명정전, 문정전 일부만이 복구되었습니다.
4. 해방 이후
창경궁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동⋅식물원으로 쓰이다가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이 결정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하였습니다. 1983년 12월 31일 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으며,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 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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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없어졌던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하여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하였습니다. 1992년에는 일본식 건물인 장서각이 철거되었습니다.
Ⅳ. 창경궁의 위치 및 건축
1. 창경궁의 위치
창경궁이 위치한 곳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였습니다. 창경궁은 조선 시대 왕궁 가운데 유일하게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남향으로 계획하지 않고, 동향을 한 사유는 이 궁이 별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지형상으로도 동향이 적합하였던 듯합니다.
2. 창경궁 궁내의 국가 유산, 보물 등
현재 창경궁에는 조선 시대 건물로는 명정전(국보 제226호), 통명전(보물 제818호), 홍화문(보물 제384호), 숭문당⋅함인정⋅환경전⋅경춘전⋅양화당⋅집복헌⋅영춘헌⋅관덕정⋅월근문⋅선인문⋅명정문과 명정전 회랑(보물 제381호)이 있습니다.
석조물로는 옥천교(보물 제386호), 풍기대(보물 제846호), 관천대(보물 제851호), 창경궁 내 팔각칠층석탑(보물 제1119호)이 있습니다. 현 낙선재 지역은 원래 창경궁에 소속되었었으나 지금은 창덕궁 경내에 있습니다.
3. 창경궁의 각종 문들
창경궁의 정전이고 명정전이고, 명정전의 출입문인 명정문은 중문이며, 궁궐의 정문은 홍화문입니다. 홍화문의 좌우에는 익각이 있고, 홍화문을 들어서면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옥천에 옥천교가 있습니다.
이 옥촌교 다리를 지나면 바로 명정문이 나오는데, 창경궁은 경복궁의 흥례문, 창덕궁의 진선문에 해당하는 문이 없어 홍화문에서 바로 명정문으로 들어가도록 구성된 점에서 다른 규모에 비해 규모가 작고 격식이 떨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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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중심 건물인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은 중심축에 맞추어 놓여 있으나, 지형을 살려 건물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반듯하게 좌우 대칭을 이루지 않고, 주변 행각도 이에 맞추어 약간 틀어져 있습니다.
Ⅴ.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의 창경궁 설명
1. 창경궁은 조선 시대 5대 궁궐 중 세 번째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로서,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 공간도 비좁아졌습니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입니다.
2. 창경궁의 건축 목적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궁궐입니다. 따라서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해 볼 때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다른 점이 많습니다.
3. 창경궁의 특징
우선 창경궁은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합니다. 공간의 구조와 배치도 경복궁처럼 평지에 일직선의 축을 이루도록 구획된 것이 아니라 창덕궁처럼 높고 낮은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언덕과 평지를 따라가며 터를 잡아 필요한 전각을 지었기에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입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도 언덕에 지어졌습니다.
4. 창경궁의 독특함
창경궁의 또 다른 독특함은 조선 시대 다른 궁궐과 주요 전각들이 남향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점입니다. 창경궁의 경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은 동쪽을 향하고, 관청 건물인 궐내 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남쪽을 향해 있습니다. 남⋅서⋅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5. 창경궁의 또 다른 특색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입니다. 따라서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도 풍부하게 전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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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 널리 알려진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사건이 일어난 현장인 창경궁에서 들으면 더 생생하게 들립니다.
6.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동궐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던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낮은 언덕을 지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이어져 본래 한 영역을 이루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