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 석굴암의 개요, 역사, 보수공사, 문화재청 소개, 평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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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석굴암의 개요, 설명, 정체
1. 석굴암의 개요 및 유네스코 세계유산
석굴암은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중턱에 위치한 암자로,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통일신라의 건축물입니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24호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석굴사원으로 그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12월 06일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19차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에서 『석굴암과 불국사』라는 제목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2. 석굴암에 입장 등
입장료는 2023년 05월 04일부터 무료 개방하였으며, 관람 시에는 실제 석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에서 지나가며 관람하는 것만 가능하나, 부처님오신날에는 차단막 안으로 들어가 옛 신라인들이 했던 것처럼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습니다. 단 내부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되고 있습니다.
Ⅱ. 석굴암의 역사
1. 신라 시대
1) 석굴암이 아닌 석불사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를 이룬 경덕왕(742~765년에 재위한 신라의 제35대 왕, 이름은 김헌영) 시기, 시중(당나라의 문하시중을 참고하여 만든 직책, 651년 진덕여왕 시절에 처음 시행된 관직, 신라의 시중은 진골 귀족의 대표자인 상대등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직책)이던 김대성과 이성룡이 창건해서 774년에 완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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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석불사로 불렸으며 유홍준(2004년부터 2008년까지 제3대 문화재청 청장 역임)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도 석불사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2) 석굴암의 제작 영향 및 가치 등
석굴암은 한국 불교의 전래 경로였던 인도와 중국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반도에는 조각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돌인 화강암과 청석류가 많고 기후도 달라서 인도와 중국만큼 석굴사원이 많이, 크게 지어지지는 않았지만, 신라에서는 나름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양산 미타암 석조아미타여래입상,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등 한국 역사에서 가치를 평가받는 석굴사원이 많이 지어졌고, 그중에서도 석굴암은 가장 정교하게 제작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 통일신라 멸망 이후 고려 시대
고려 건국 이후 수도인 개성중심지에서 멀어진 석굴암은 그 존재감이 약해져 일부 기행문에서만 간간이 언급되는 정도였습니다. 다만 17세기~18세기 정시한의 산중일기, 정선의 교남명승첩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까지는 어느 정도 석굴암이 관리되었고 특히 정시한의 산중일기에는 전주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보러 오는 사람이 언급되므로 전국적으로 알려졌었고 참배객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조선 시대
1) 지방으로 전락한 조선의 경주
조선 시대에는 경주도 평범한 지방 도시로 위상이 완전히 격하되었고 불교도 숭유억불 정책으로 차츰 세가 줄어드는 와중에 본전인 불국사마저 폐사되자 석굴암도 해발고도 565m 산 중턱에 있다는 점까지 겹쳐 차츰 망각 되고 방치되었습니다.
2) 보수기록 존재
그러다가 조선 숙종 29년(1703), 영조 34년(1758)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말기 울산 병사 조예상이 크게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3) 조선 말기의 상황과 석굴암
조선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활발해서 깊은 산 속의 치안이 불안해져 스님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 비어 있는 절이 많았었습니다. 1902년 08월, 세키노 타다시, 1906년 이마니시 류 등 당대의 일제 유수의 사학자들이 불국사를 보러 와서 사진도 찍고 조사했는데 석굴암은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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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불국사를 방문한 뒤로 매우 많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유적지를 활발하게 조사했는지를 생각해 볼 때 불국사를 가서도 석굴암에는 방문하지 않은 것은 그 존재를 몰랐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Ⅲ. 석굴암의 보수공사
1. 일제강점기
시 기 | 관 련 내 용 | 비 고 |
1907년 | •이때까지 석굴암은 조가절(나라 趙, 집 家, 절 寺)이라 불리며 일반인들이 향을 올리고 공양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우체부가 석굴을 새로 발견한 듯이 조작하고, 일본인들이 석굴을 훼손하고 문화재를 무단으로 가져가는 계기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 이후 일제가 석굴암 보수에 동원된 인력들은 기차 철로를 부설하는 토목 기술 인력이었고, 이들은 기차 철로의 터널처럼 석굴을 수리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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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 • 석굴 주변에서 샘을 발견하였습니다. 샘의 역할은 물을 석굴 밑으로 10초에 1리터씩 일년내내 흘려보내며 습기를 조절하고 있었고, 석굴보다 아래로 흐르는 샘물이 더 차가우면 아래에만 습기가 맺혀 자연스럽게 습기가 조절되는 그런 기능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나중에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 |
1913년 10월 | •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를 설치하여 해체공사의 기초를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 |
1914년 | • 본공사에 들어가 석굴을 완전히 해체했습니다. | |
1915년 09월 | • 석벽을 보강하기 위해 석벽 뒤에 시멘트를 석 자(약 30.3cm)를 바르고 본공사를 마무리합니다. | |
1917년 | •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 |
1920~1923년 | • 천장의 방수를 위해 다시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실시했습니다. | |
1927년 | • 습기로 생긴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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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민국
시 기 | 관 련 내 용 | 비 고 |
1961~1963년 | •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전 준비를 하지 못한 상황으로, 일제가 만든 콘크리트 벽에서 1m를 띄우고 다시 콘크리트로 돔을 만들어 씌우고 그 위에 흙을 덮어버렸습니다. • 석굴 앞에 나무로 된 전각을 만들고, 빛 구멍(광창, 빛 光, 창 窓)과 천장 감실 쪽을 막아버려서 지하수 배수시설을 설치했음에도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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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김효경 교수는 석굴암 우측에 환풍기를 설치하였습니다. 그 사유는 기계 공학적으로 습기와 온도를 조절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 |
1970년 | • 다시 앞 지붕을 짓고 입구에 유리로 설치했고, 제습기로 실내의 습도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기 시작했습니다. | |
현재 | • 일반인은 석굴암 본존에는 출입을 금지하고, 매년 석가탄신일에만 석굴암 본존 내부를 공개합니다. • 석굴암 본존을 유리막이 설치된 밖에서는 항상, 관람이 가능합니다. |
Ⅳ.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있는 석굴암에 대한 설명자료
1. 석굴암의 건립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대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습니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 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삼층석탑, 황룡사 종 등 많은 문화재가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2. 석굴암의 위치 및 현존 상황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 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습니다.
3. 석굴암의 구조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입니다.
4. 석굴암의 상세 구조 및 조각 불상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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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5. 석굴암의 미술사적 가치 등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한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 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은 동아시아 불교 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합니다.
6. 석굴암은 신라 불교 예술의 극치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으로 더욱 돋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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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석굴은 국보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습니다.
7. 석굴암의 일반 공개
한편, 2024년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 벽 외부에서 관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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