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 칸 : 테무친 : 보르지긴 테무친 : 몽골 제국 : 특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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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칭기즈 칸 : 테무친의 간단명료 설명
- 칭기즈 칸, 영어로는 Genghis Khan이라 불립니다.
- 출생은 1162년 11월 12일로 알려져 있고
- 승하는 1227년 8월 25일로 66세로 승하합니다.
- 칭기즈 칸은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칸입니다.
- 중국식 별칭은 칭기스 황제, 묘호는 태조, 시호는 법천계운성무황제입니다.
-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친으로,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정복하고 몽골 제국을 성립시켜
- 몽골과 중국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 이르는
- 넓은 영토를 정복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Ⅱ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일생
1. 칭기즈 칸 : 테무친의 탄생
- 훗날 칭기즈 칸으로 불리는 테무친은 1160년경 오논강 인근
- 델리운 볼락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키야트 부족인
- 아버지 예수게이와 어머니 호엘룬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2. 칭기즈 칸 : 테무친의 탄생에 대한 여러 가지 설
- 칭기즈칸의 출생년도는 1162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 역사서마다 달라서 1155년, 1163년, 1167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습니다.
- 현재 몽골에서 기념하는 칭기즈 칸의 탄신일은 1162년 11월 14일입니다.
3. 칭기즈 칸 : 테무친의 형제자매
- 아버지 예수게이는 옹기라트부 출신 호엘룬 외에도 먼저 부인 소치겔과
- 그 사이에서 아들 벡테르, 벨구테이가 있었습니다.
- 집안이 한미했던 소치겔은 예수게이의 본 부인임에도
- 호엘룬에게 정실부인 자리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4. 칭기즈 칸 : 테무친의 부족 몽골 부
- 몽골 부는 위구르 제국의 해체 후 바이칼 호수 방면에서 남하해서
- 몽골고원의 북동부에 퍼져 살았습니다.
- 칭기스 칸의 생애를 그린 몽고의 전설적인 역사서 몽골 비사에 의하면
- 그의 원조는 하늘의 명령을 받고 바이칼 호수에 강림한 보르테 치노[푸른 늑대 라는 뜻]와
- 그의 아내 될 코아이 마라루[푸르고 흰 사슴의 뜻] 라고 합니다.
Ⅲ.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유년기 불행
1. 아버지 예수게이의 독살
- 그가 9세 때 몽골 왕족 보르지긴족의 후예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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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게이는 아들 테무친의 배우자를 정하러 옹기라트부족의 족장을 만나
- 그의 딸 보르테를 테무진의 약혼자로 정하고 오던 길에
- 타타르족의 막사에서 며칠 보내게 되었습니다.
- 그러나 몽골 부족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타타르족은
- 예수게이를 손님으로 받아들였다가 독살하였습니다.
2. 칭기즈 칸 : 테무친의 타이치우드 가문과의 갈등
- 테무진과 그의 형제는 사냥 노획물을 약탈하는 이복 형 벡테르와 갈등하다가
- 그를 살해했습니다.
- 벡테르는 죽으면서 자신의 가계를 잇길 청하여 벡테르의 친동생이자
- 테무진의 다른 이복 형 벨구테이는 살려두었다.
- 타이치우드 가만의 타루구타이 키릴토쿠는 이복 형을 죽였다는 것을 빌미로
- 테무진을 감금하였습니다.
- 테무진은 나중에 스루도스 부족의 소르칸 시라 등의 도움을 얻어 탈출에 성공합니다.
3.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친구들
- 몽골비사에 따르면 이때 우연한 기회로 테무진의 친구가 된 네 명
- 아루라트씨족의 보오르추, 테무진의 집안 가신이었던 우리양카이 집안의 제드메
- 테무진을 도와준 소르칸 시라의 아들 치라운, 친베 등 4명은
- 그의 최측근이 되며, 이 중 보오르추, 치라운은 무칼리 등과 함께
- 칭기즈칸의 사준사구 중 사준이었고, 칭기즈 칸의 동지이자 유력 공신들 중의 하나가 됩니다.
- 사준은 전쟁에서 칭기스 칸의 옆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고 호위하는 역할을합니다.
Ⅳ. 칭기즈 칸 : 테무친의 토그릴 완 칸과의 협상
-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의형제]를 맺었던, 예수게이에게
- 정치적 도움을 받은 적 있는 케레이트부의 한 부족장인
- 토그릴 완 칸을 찾아갑니다.
- 테무진과 그의 가족은 비록 보르지긴족들의 배척을 받긴 했지만
-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대접을 받은 것 같습니다.
-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기 전에 정혼해 준 아내
-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 그러나 몽골 북방에 사는 메르키트족은 예수게이가 그들에게 빼앗은 여자인
- 호엘룬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테무진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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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이유로 메르키트족은 테무진의 아내인 보르테를 납치했습니다.
-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족의 왕인 토그릴 완 칸에게
- 사정을 말하여 보르테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 당시 토그릴 완 칸은 몽골 지역 안에서 가장 강대한 통치자였습니다.
- 테무진은 결혼기념물로 받은 잘의 모피를 토그릴에게 선물했고
- 답례로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의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Ⅴ. 칭기즈 칸 : 테무친의 권력자로 부상
1. 칭기즈 칸 : 테무친의 메르키트족 정복
- 강력한 동맹세력의 후원을 받은 테무진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 메르키트족을 패배시켰습니다.
- 그리고 장래에 자신을 반역할 기미가 있는 부족은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 메르키트족을 정복한 뒤, 자무카는 타이치우드 가문과 동맹하고
- 키야트가문을 규합한 테무진과 바루주토의 평원에서 교전하였습니다.
2. 칭기즈 칸 : 테무친의 부족의 지도자들과의 관계
- 메르키트족을 패배시킨 이래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 최고 실력자가 되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 이로서 부족의 지도자들은 테무진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 12세기 말에 이르자 그들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테무진을
- 몽골족의 칸(왕)으로 옹립하자는 제의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 그리고 지도자들은 전쟁과 수렵에서 테무진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3.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자르하족 정벌
- 1190년 테무진의 영도하에 키야트부족의 세력은 강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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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르하부족의 수령이기도 했던 자무카는 불만을 품었고
- 자무하의 동생 차르파는 테무진의 부하들을 습격하여 죽였습니다.
- 테무진 휘하 13개 부락 3만여 명이 차르파에게 살해되었습니다.
- 그래서 테무친은 즉시 13익[13개 부락]으로 군사를 편성해 자무카와 교전하였습니다.
- 1201년 타타르족 잔존 세력과 메르키트족, 그리고 테무친의 친척인
- 타이치우드 부족이 연합하여 자무카를 칸으로 추대, 고아 칸이라 칭했습니다.
- 1202년 테무친은 타타르 족과 교전, 타타르족 수령 자린부카를 죽이고
- 나머지 잔존 타타르인 백여명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4. 칭기즈 칸 : 테무친의 타타르족 정복
- 유목민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여 변방의 평화를 유지했던 금은
- 가끔씩 변방정책을 바꾸어 그들의 동맹세력인 타타르족을 공격했습니다.
- 토그릴과 함께 테무진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타타르족의 배후를 공격했습니다.
-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그는 강대한 타타르족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것입니다.
-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패배시킨 뒤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자들은
- 곧 어른은 모두 죽이고, 단지 아이들만 살려두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커서
- 자신들의 신분을 잊고 몽골의 충실한 추종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금나라 황제는 토그릴에게 왕(王)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 테무진에게는 그보다 낮은 칭호를 내렸습니다.
5.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숙청작업
- 테무진은 조직적으로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 친구이며 오랜 동료였던 자무카가 조직한 여러 세력의 연합은
- 그에게 패배를 거듭하여 그 존재가 없어졌고, 타타르족은 몰살당했습니다.
6. 칭기즈 칸 : 테무친의 나이만족 정복
- 1199년 칭기즈 칸은 케레이트부와 연합, 고원 서쪽 알타이산맥 방면에 있던
- 나이만부를 공략했습니다.
- 서부지역의 나이만부 통치자는 보르지긴족의 강력한 세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 자무카와 합동으로 연합세력을 형성했으나, 완전히 패배했고
- 나이만 왕국은 없어졌습니다.
7.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케레이트와의 갈등과 대칸 즉위
- 1202년 서쪽 나이만, 북 메르키트부족 연맹이 북서쪽에 있던
- 오이라트와 동방 동맹의 잔당과 맺고, 케레이트 공격했지만
- 테무진과 옹 칸은 고전 끝에 이를 물리치고 고원 중앙부의 패권을 차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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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5년 테무진은 고원에 남은 마지막 큰 세력인 서나이만부와
- 북메르키트부족을 격파하고, 동지에서 적이 된 자무카를 마침내 잡아 처형했습니다.
- 자무카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테무진에게 넘겨졌으나
- 그는 배신한 자무카의 부하들을 처형하고 자무카는 피를 보지 않게 처형했다 합니다.
- 1206년 테무진은 쿠릴타이를 소집했고, 1206년 2월 오논강변에서 열린 족장대회의에서
- 테무진은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Ⅵ. 칭기즈 칸 : 테무친의 몽골족 통일
1.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지도력
- 1206년은 몽골 및 세계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습니다.
- 몽골족은 스텝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 몽골 자체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습니다.
- 칭기즈 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통일된 몽골족이 존재하게 되었고
- 몽골족은 많은 변천과정을 거쳐서 오늘날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 1207년 아들 주치를 보내 삼림 부족을 정벌, 복속시켰습니다.
- 1210년에는 그의 손자와 동명이인이자 사준사구의 한사람인
- 쿠빌라이를 보내 투르크계 유목민 카를루크족을 정벌
- 카를루크족의 부족장 아라사란 칸이 부락을 이끌고 투항해왔습니다.
Ⅶ. 칭기즈 칸 : 테무친의 몽골군의 특징
1. 칭기즈 칸 : 테무친의 믿을 수 있는 군인들
- 몽골족의 야망은 스텝지역 밖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 칭기즈 칸은 세계정복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 새로운 몽골국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되었습니다.
- 칭기즈 칸의 군대는 10진법 체제로 나뉘어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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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장들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사람들이었습니다.
2.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유연한 무기사용
- 칭기즈 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환경에 잘 적응했다.
- 처음에는 그의 군대는 사료가 필요 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 그뒤로 몽골족들은 규모가 큰 성읍도 투석기⋅쇠뇌⋅사다리와
- 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함락시킬 수 있었고
-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아 홍수가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 정착문화를 가진 국가와 접촉하게 되면서 칭기즈 칸은
- 서서히 공격⋅파괴⋅약탈보다 더 멋진 권력의 향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3.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유능한 참모들
- 칭기즈 칸에 대항했던 마지막 몽골 부족인 나이만의 한 신하는
- 그에게 문화의 유용함을 일깨워 주었고, 몽골어를 문자로 정착시키는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 한때 금나라의 신하였던 야율초재는 농민과 장인들이 생산해내는 물품은
-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었습니다.
Ⅷ.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정복 사업
1.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서하 정복과 위구르 복속
- 1209년에 서하에서 칭기즈 칸에게 복속,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하고
- 강화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 이어서 톈산 위구르 왕국를 복속시키고
- 경제 감각이 뛰어난 위구르인의 협력을 얻는 데 성공합니다.
2. 칭기즈 칸 : 테무친의 금나라 공략
- 1213년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를 공략하여
- 만리장성 이남의 금나라의 영토를 정복하고 병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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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4년 칭기즈 칸은 금나라와 화약을 맺고 일단 군사를 후퇴시켰지만
- 화약의 직후에 금나라가 몽골의 공세를 두려워해서 황하강의 남쪽으로
- 옛 북송의 도읍인 개봉으로 수도를 옮기자 칭기즈 칸은
- 이를 배신행위로 규정하고 다시 금을 공격했습니다.
3.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서요 정복
- 나이만 부족 연합의 부족장의 아들 쿠츨루크는 나이만족 멸망 후 망명하고
- 서요로 가서 야율직로고의 보호를 받고, 그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 그러나 쿠츨루크는 야율직로고를 배신하고,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 서요의 혼란을 접한 칭기즈 칸은 쿠츨루크 토벌을 선언, 추격하였으나
- 몽골군의 주력은 서하에 대한 계속적인 10년 간의 원정으로 피폐해졌고
- 첫 서요원정은 실패하였습니다.
- 이에따라서 칭기즈 칸은 장군 제베에게 2만 군을 주고 선봉대로 보냈으며
- 쿠츨루크를 맡도록 했습니다.
4. 칭기즈 칸 : 테무친의 호라즘 정복
- 칭기즈 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호라즘 샤의 정벌에 나섰습니다.
- 호라즘 정벌에는 그의 아들 오고타이와 차가타이 등이 동행 출전하였습니다.
5.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철저한 섬멸전
-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 이그만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 몽골족은 가는 곳마다 도시를 불태웠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 동족이라도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이라면 모두 몰살시키는
-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습니다.
Ⅸ.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정복지역 및 정복 활동
- 무자비하고 잔인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 칭기즈 칸은 몽골에서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습니는다.
- 칸이 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몽골 연맹을 통합하여
- 흩어져 있던 부족들에게 동질감을 형성하였고
-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 칸은 역설적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
- 전쟁의 처참함을 가져온 후에 가장 분쟁이 적은 평화의 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Ⅹ.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최후의 전쟁
- 1211년 이준욱이 반란을 일으켰고, 양종은 퇴위하였으며 그 해 사망했습니다.
- 양종 역시 전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군주로
- 이러한 일이 몇 년 안에 잇따라 발생하자 이전의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 금과의 전쟁으로 국력은 급속히 쇠퇴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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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1219년과 1226년에는 연달아 칭기즈 칸의 서정 참가를 거부하여
- 칭기즈 칸의 분노를 샀습니다.
Ⅺ. 칭기즈 칸 : 테무친에 대한 비판
- 정복지 나라의 국민이 이처럼 멸족당한 예는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일로
- 이는 칭기즈칸과 몽골 제국이 얼마나 잔학한 정복자였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며
-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Ⅻ. 칭기즈 칸 : 테무친의 통치법
- 칭기즈 칸은 주변국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했습니다.
- 그러나 반항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습니다.
- 바그다드와 이스파한 등의 지역에는 거의 100,000개가량 되는
- 해골들로 탑을 쌓기도 했습니다.
- 특히 샤리 골골라의 경우 정복활동 도중 칭기스 칸의 손자인 모토칸이
-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칭기즈 칸의 분노를 사서
-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두 죽일 뿐만 아니라 모든 건물을 없애버려
- 전대미문의 폐허로 만들면서 멸망시켰습니다.
13. 칭기즈 칸 : 테무친의 지도자로서의 특징
- 철저한 능력위주의 군 인사행정
- 계급이 미천한 자라도 능력이 있다면 귀히 쓰지만
- 능력이 없는 자라면 계급을 강등했음.
- 이민족이라 해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인재 흡수 정책
- 승마능력과 기동성이 뛰어난 군대
- 상인들을 통한 정확한 정보수집
- 다른 종교[기독교, 이슬람]에 대한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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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복하고자 하는 나라가 다종교사회인 경우 : 특정 종교를 지지하여 내분을 조성
- 학자인 야율초재와 같이 일함으로써 학식을 이용.
'교육, 역사, 사회, 상식, 깨달음, 알라차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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