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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출신 성분, 왕위 계승 정통성, 탕평책과 아들 사도세자, 손자 정조

by 성복동향나무 2024.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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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의 출신, 왕위 계승 정통성, 탕평책과 아들 사도세자, 손자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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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영조의 간략 설명

 
- 영조는 조선후기 제21대 왕이고, 재위 기간은 1724~1776년으로 조선 역대 왕 중
 
-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영조 - 정조 어진

 
- 즉위 과정과 즉위 후에 왕위 자체를 부정당하는 당쟁의 폐해를 몸소 체험하고 
 
- 이를 타파하기 위해 탕평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여 국정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 나아가 균역법실시 등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 개편과 문물 정비 등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민생안정을 통해 민심을 추스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 사후 묘호는 영종이었으나 고종 때 영조로 고쳐 올렸습니다. 
 
- 능호는 구리시에 있는 원릉입니다. 
 

Ⅱ. 영조의 정의

 
- 조선의 제21대(재위: 1724년~1776년) 왕. 
 
- 재위 1724∼1776. 이름은 이금(李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 숙종의 세 아들(景宗 · 英祖 · 延齡君) 중 둘째이며,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입니다.
  
-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이고,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입니다.
  

Ⅲ.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한 관계로 영조의 왕위승계 난항

 
- 1699년(숙종 25)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 노론 유력자인 김창집(金昌集)의 종질녀로서 숙종 후궁이던 영빈(寧嬪) 김씨의 양자노릇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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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 인해 숙종 말년 왕위계승 문제가 표면화되었을 때, 이복형인 왕세자(후일의 경종)를
 
- 앞세우는 소론에 대립했던 노론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 1721년 숙종이 승하하고 왕세자가 즉위해 경종이 되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고
 
- 또 아들이 없었습니다. 
 
- 이에 노론측은 앞서 숙종 말년에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의 독대에서 논의된 대로 
 
- 연잉군을 경종의 후계자로 삼는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 정언 이정소(李廷熽)의 세제책봉상소를 계기로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 이른바 노론 4대신의 요구와 
 
- 이들과 연결되어 있던 왕실의 최고 존장자인 대비 김씨(숙종의 제2계비인 人元王后)의 
 
- 삼종혈맥(三宗血脈) 논리의 지원을 받아, 연잉군이라는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 경종의 뒤를 이을 왕세제로 책봉되었습니다. 
 
- 삼종혈맥이란 효종⋅현종⋅숙종에 걸치는 3대의 혈통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 숙종의 유교(遺敎)라고 하는데, 여기에 따르면, 임금인 경종 외에는 연잉군밖에 없는 셈이 됩니다.
  
- (이복동생인 연령군은 숙종 말에 죽었음.)
  
- 기타 여러 난제들이 많았으나 여시서 절사합니다.
  
- 연잉군(영조)를 보좌하는 동궁요속(東宮僚屬)이던 김동필(金東弼), 조현명(趙顯命)
  
- 송인명(宋寅明), 박문수(朴文秀) 등과 대비 및 경종의 보호로, 불안한 속에서도
  
- 세자의 자리를 지켜 1724년 경종이 죽음에 따라 왕위에 올랐습니다. 
 

Ⅳ. 영조와 탕평책

 
- 왕위에 오른 직후 영조는 장차의 탕평책 시행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붕당의 폐해를 들어
 
 - 붕당 타파를 천명하였습니다. 
 
- 영조가 탕평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은 아마도 세자로 책봉된 뒤일 것입니다. 
 
- 노소론 사이의 정쟁이야 숙종 때부터 계속되어 왔지만 그때는 자신과 별다른 관련이 없었으나
 
- 왕세자 책봉과 대리청정에서부터 노소론간의 당론이 충역론으로 확산되면서 
 
- 자신이 바로 그 정치적 소용돌이의 핵심에 처하여 생명까지 위협받는 경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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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조의 탕평책이 본궤도에 오르는 것은 1728년의 무신란(戊申亂, 혹은 李麟佐의 亂)을 겪고 나서였습니다. 
 
- 애초에 영조의 반대편에 섰던 소론은 영조가 왕세제로서 경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 대체로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이었으나 김일경으로 대표되는 과격파(急少)들은 
 
-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더욱이 김일경이 처형되고 을사환국으로 노론정권이 들어서서 
 
- 일반 소론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이들이 숙종 20년의 갑술환국 때 
 
- 노론에 의해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몰려 정계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 일부(흔히 己巳餘孼이라 함)를
 
 - 규합해 무신란을 일으켰습니다. 
 
- 반란은 정미환국으로 집권하고 있던 이광좌, 오명항(吳命恒) 등의 소론정권에 의해 
 
- 조기에 진압되었으나 당쟁의 폐해로 변란까지 겪게 된 영조로서는 
 
- 붕당타파에 의한 탕평의 실현이란 명분 하에, 노⋅소론에게 교대로 정권을 맡기는 
 
- 환국형태가 아닌 탕평정국을 위한 새로운 정국운영방식을 모색해야만 하였습니다. 
 
- 그것이 조문명(趙文命), 조현명 형제와 송인명에 의해 주장된, 권력 구성에 노⋅소론을 안배해
  
- 함께 참여시킴으로서 공동정권을 구성하는 조제(調劑)형태의 탕평책이었습니다. 
 

Ⅴ. 영조의 왕위계승 정통성 문제와 사도세자의 죽음

 
- 1762년(영조 38) 영조가 자신의 외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든 
 
- 참변(壬午禍變)을 일으킨 것은 자신의 왕위계승 정통성의 갈등 속에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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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임의리의 붕괴를 우려하는 노론 일부의 불만을 수습하기 위해서였건
 
- 홍계희, 김상로와 정순왕후 등의 궁중세력의 모함에 빠져서였건, 아니면 『한중록』의 
 
- 서술처럼 이상 성격으로 인해 임금이 되기에 부적절한 인품이어서
 
- 미리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간에 영조 개인으로서는 
 
- 정치에서 또 한번의 고통과 좌절을 받게 된 셈입니다. 
 
- 더구나 나라의 근본(國本)이라는 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 한두 명의 동궁요속이 세자를 구원하려 했을 뿐, 어느 누구도 목숨을 내놓고 
 
- 임금에게 충간해 신절(臣節)을 지킨 신하는 없었습니다.
 
- 이는 1689년(숙종 15)의 인현왕후 폐출 시 박태보, 이세화의 죽음과 극히 대조적입니다.
  
- 탕평이 사대부의 명절(名節)을 무너뜨린다는 지적대로 영조에게 왕권의 안정은 
 
- 가져다주었으나, 이제 군신관계는 이록(利祿)을 매개로 할 뿐 
 
- 전날의 사림정치에서 보는 의리는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Ⅵ. 영조의 정치적 실적

 
- 영조는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고, 또 비상한 정치능력을 가진데다
  
- 탕평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구축했기에 국정운영을 위한
  
- 제도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대책 등 여러 방면에 적지 않은 치적을 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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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5년 영조는 압슬형(壓膝刑)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 추형을 금지시켰으며, 1729년 사형수에 대해서는 삼복법(三覆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 형살(刑殺)에 신중을 기하게 하고, 1774년 사문(私門)의 용형(用刑)도 엄금하였습니다. 
 
- 그리고 남형(濫刑)과 경자(鯨刺)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켜서 인권존중을 기하고 
 
- 신문고제도(申聞鼓制度)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습니다.
  

Ⅶ. 영조의 경제 정책

 
- 영조는 경제정책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서 1725년 각 도의 제언(堤堰)을 수축 
 
- 한재에 대비하게 하였고, 1729년에는 궁전 및 둔전에도 정해진 분량을 
 
- 초과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세하도록 하는 한편, 오가작통(五家作統) 및 이정(里定)의 법을
  
- 엄수하게 해 탈세방지에 힘썼습니다.
  
- 그리고 1760년에는 서울의 주민 15만명과 역부(役夫) 5만명을 동원해 2개월간에 걸쳐
  
- 개천(介川, 즉 오늘날의 청계천)을 준설하게 하고, 이어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여
  
- 이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서울시민의 골칫거리였던 하수처리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Ⅷ. 영조와 균역법

 
- 영조 재위 기간에 시행된 경제정책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바로 
 
- 균역법(均役法)이었습니다. 
  
- 단순한 감필(減疋)이 아니라 모두 1필역(一疋役)으로 부담을 균일하게 함으로써
  
- 양역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양역민의 부담을 크게 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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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감필로 인한 재정부족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결전(結錢)을 토지세에 덧붙여서
  
- 양반이 위주인 지주층의 부담을 끌어내고, 비록 일부이기는 하나 피역자에게
  
- 선무군관(選武軍官)이란 명칭을 부여하여 군관포를 징수하였습니다.
  

Ⅸ. 영조의 어머니 신분과 경종의 독살설 관련

 
-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함에서 오는 심적 갈등이 심한데다가 이복형인 경종의 독살에
  
- 관련되었다는 혐의와, 심지어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유언비어에 시달리고
  
- 마침내는 왕으로서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무신란까지 겪었습니다.
  
- 이런 환경 탓인지는 모르나 영조는 때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 이상 행동을 보이는 성격장애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 자녀에 따라 극단적인 애증을 나타낸 것이 이를 말하며, 이것이 결국
  
- 사도세자의 울화병을 유발하고 부자간의 갈등을 초래했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Ⅹ. 영조의 죽음과 사후

 
- 1776년 83세로 승하하니, 조선시대 역대왕 가운데에서 재위기간이 
 
- 52년으로 가장 길었습니다. 
 
- 처음에 올린 묘호(廟號)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90년(고종 27)에 영조로 고쳐 올렸습니다.
  
-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원릉(元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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