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성장 과정과 가문의 자랑, 정조와 18년 귀향, 목민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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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정약용 선생님 소개
- 정약용(丁若鏞, 1762년 ~ 1836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입니다.
- 본관은 나주,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탁옹(籜翁)
- ⋅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문암일인(門巖逸人)
-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입니다.
다산 정약용
- 2012년,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Ⅱ. 정약용의 출생과 성장
-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마현(馬峴), 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94)에서 태어났습니다.
- 정약용이 태어난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정선, 영월, 충주, 여주를 거쳐 양수리에서
- 북한강과 합류합니다.
- 현재는 생가터와 실학박물관등 정약용 유적지가 잘 조성되어있습니다.
Ⅲ. 정약용의 부친과 가족
- 부친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 둘째 부인인 고산 윤선도의 오대손녀인 윤소온(해남 윤씨, 조부 윤두서, 부친 윤덕렬)씨
-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며
- 정약용은 4남 2녀 중 네번째 아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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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이 태어난 해에는 영조의 노여움을 산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5월)
- 부친 정재원은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였고 그해 6월에 태어난 정약용의 아호를
- 귀농(歸農)이라 지었습니다.
- 벼슬을 탐하여 당쟁에 휘말리지 말고 농촌에 귀의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Ⅳ. 정약용의 가문
- 정약용의 선조들은 8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모두 홍문록에 올랐는데
- 고조부, 증조부, 조부의 3대에 이르러서는 벼슬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 아버지 정재원은 1762년 3월에 생원시에 합격 한 후에는 대과에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 출세에는 큰 욕심이 없었기에 사돈인 채제공이 대과 응시를 여러 차례 권유하였으나 마다하였습니다.
- 뒤늦게 음관으로 벼슬길에 나간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으며
- 호조좌랑, 울산부사, 진주목사(정3품)까지 지냈습니다.
Ⅴ. 정약용 가문의 내력
- 본관은 압해(押海), 지금은 전라남도 신안군에 속하는 섬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나주목에 속해있었기에
- 나주 정씨로도 불렸습니다.
- 조상들은 고려 말에 황해도 배천에 살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서울로 이주했습니다.
- 11대 조부 정자급(丁子伋)이 승문원 교리를 지낸 이래 8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습니다.
-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정수강, 병조 판서를 지낸 정옥형,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정응두
- 대사헌을 지낸 정윤복,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정호선, 홍문관 교리를 지낸 정언벽
- 병조 참의를 지낸 정시윤입니다.
- 8대 조상이 연이어 모두 홍문관 명부에 이름을 올렸는데, 홍문관은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 삼사(三司)로 불린 중요부서로 학문이 높은 학자관료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Ⅵ. 정약용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
- 조선의 역대 문과 급제자들의 명부인 [국조문과방목]을 보면 홍문관에서 근무한 자들은
- 따로 표시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 조선시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으로서 정승⋅판서 등 고위 관리들은
- 거의 예외 없이 이곳을 거쳐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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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정약용은 평소 팔대옥당(八代玉堂)이라 하며 학문명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여 남인이 몰락하자 5대조 정시윤은
- 당쟁을 피해 경기도 광주 마현(馬峴)으로 옮겨 살았습니다.
- 고조부 정도태(丁道泰), 증조부 정항신(丁恒愼)은 벼슬을 하지 못했습니다.
- 고조 정도태, 증조 정항신은 진사시에 입격했고, 조부 정지해(丁志諧)는 통덕랑에 오르기는 했습니다.
Ⅶ. 정약용의 언문습득
- 정약용은 특별한 스승이 없이 부친 정재원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습니다.
- 형 정약전은 성호 이익의 학맥을 잇는 녹암 권철신으로부터 사사했으나
- 정약용은 부친의 가르침 이외에 독학하였습니다.
- 이가환, 이승훈과 교류하게 되면서 이익의 학문을 접했으나 유작을 통해서 사숙(私淑)했을 뿐입니다.
Ⅷ. 네 살에 천자문 학습
- 네살에 천자문을 배웠고 일곱 살 때 [바다]라는 시를 지은 것이 남아있습니다.
-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책을 냈는데
- 현재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 삼미(三眉)라는 별명은 어릴 적에 걸렸던 천연두가 나으면서 생긴 흉터 때문에
- 눈썹이 세 개 생겼다는 뜻입니다.
- 아홉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맏형수 경주 정씨와 계모 김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 열 살 때 경서와 사서를 모방해서 작문한 글이 자신의 키만큼 쌓였다고 할 정도입니다.
Ⅸ. 정약용의 천연두 치료 계기
-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사가 명의였던 이헌길의 진료로 인하여 살았습니다.
-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 집필하고, 이것은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생명을 구합니다.
-또한 정약용은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Ⅹ. 정약용의 성호학파 입문
- 1776년 결혼하여 처가에 왕래하기 위해 서울을 자주 드나들면서
- 이때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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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해 아버지가 다시 벼슬을 하여 호조 좌랑이 되었으므로 서울에 집을 세내어 살았습니다.
- 1776년 4월 10일(음력 2월 22일)에 승지 혼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과
- 매부 이승훈을 만났습니다.
- 이들에게서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사상의 토대를 다졌고
-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습니다.
- 정약용이 어린 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습니다.
-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습니다.
- 1782년, 서울에 집을 마련하여 정착 한 후 과거공부에 전념하였고
- 1783년에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습니다.
- 22세에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매달 치르는 시험과
- 열흘마다 치르는 순시(旬試)에 매번 높은 성적으로 뽑혀서 책과 종이와 붓을 상으로 하사받으며
- 정조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Ⅺ. 정약용의 관직생활
1. 대과급제 후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거중기 발명
- 1789년(정조 13년), 27세 되던 해에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습니다.
-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 1791년 신해박해 때 공서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 11일 만에 풀려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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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고. 1791년에는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 거중기를 활용하였습니다.
- 30세가 되던 해인 1792년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사망합니다.
2. 성균관 생활
- 1794년에는 성균관에서 강의하게 되고, 음력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였습니다.
- 1795년 을묘박해 사건이 벌어졌을 때 모함을 받아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습니다.
-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 곡산 부사 등을 지냈고.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습니다.
3. 곡산부사 생활
- 곡산 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계심이라는 농업노동자의 조세저항 운동인
-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 법학자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용기를 격려하였습니다.
-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생존권을 요구하는
-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습니다.
-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습니다.
Ⅻ. 정약용의 귀양살이
-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저술하였으며
-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습니다.
-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입니다.
13. 정약용의 말년
-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습니다.
-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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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신신당부로 이른 말은 [한양을 벗어나는 순간
-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양에서 버텨라]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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