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 할아버지 영조, 탕평책, 인재등용 등 문예부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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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정조의 간략 설명
- 정조는 조선후기 제22대 왕이며 재위 기간은 1776~1800년입니다.
- 영조의 둘째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아들입니다.
-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임금이자 스승임을 자부하며 당파적 분쟁을 뛰어넘어
- 개혁과 통합을 이루어냈습니다.
- 규장각을 정권의 핵심기구로 삼고 실학파와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 문화정치를 완성해갔으며, 문물제도의 정비사업 완결, 사고전서 수입과 각종 서적 편찬
- 친위군인 장용영 설치, 신도시 수원 화성 건설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 강한 왕권으로 왕도정치의 모범을 보이며 조선후기 문화부흥을 이루었습니다.
- 그러나 정조의 사후 조선은 급격한 쇠퇴기로 접어듭니다.
Ⅱ. 정조의 정의
- 조선의 제22대(재위: 1776년~1800년) 왕.
Ⅲ. 정조의 초간단 설명
- 재위 1776∼1800. 이름은 이산(李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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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입니다.
Ⅳ.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 죽음과 삼촌 효장세자
-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뒤에 眞宗이 됨)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습니다.
Ⅴ. 정조의 즉위
-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Ⅵ. 정조의 학문 연마와 정적 축출
- 그리고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해 청나라의 건륭문화(乾隆文化)에 관심을 갖고
- 서적을 수입하면서 학문 연마에 힘썼습니다.
- 즉위 후 곧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해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홍상간(洪相簡)⋅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하였습니다.
- 나아가 그의 총애를 빙자해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해
-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해 규장각을 문형(文衡)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 홍문관⋅승정원⋅춘추관⋅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습니다.
-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성지화(作成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입니다.
Ⅶ. 정조의 인재양성 및 서적 간행
- [작성지화]의 명분 아래 기성의 인재를 모으고, 참상(參上)⋅참외(參外)의 연소한 문신들을 선발해서
- 교육하여 육성하고 국가의 동량으로 키워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 [우문지치]의 명분 아래 세손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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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생생자(生生字)⋅정리자(整理字)
- ⋅춘추관자(春秋館字) 등을 새로 만들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습니다.
- 사서⋅삼경 등의 당판서적(唐版書籍)의 수입 금지 조처도 이와 같이
- 자기문화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 그리고 왕조 초기에 제정, 정비된 문물제도를 변화하는 조선후기 사회에 맞추어
- 재정리하기 위해 영조 때부터 시작된 정비작업을 계승, 완결하였습니다.
-『속오례의(續五禮儀)』⋅『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국조보감(國朝寶鑑)』
- ⋅『대전통편(大典通編)』⋅『문원보불(文苑黼黻)』⋅『동문휘고(同文彙考)』
- ⋅『규장전운(奎章全韻)』⋅『오륜행실(五倫行實)』 등이 그 결과입니다.
- 그리고 1814년에는 자신의 저작물도 정리해 뒷날 『홍재전서(弘齋全書)』(184권 100책)로
- 간행되도록 하였습니다.
Ⅷ. 당쟁에 대한 혐오감 및 탕평책
-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당쟁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졌으며, 왕권을 강화하고
-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습니다.
- 그러나 강고하게 세력을 구축하던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해 벽파(僻派)로 남고
-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時派)를 형성해
-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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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1794년에 들고 나온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문풍(文風)의 개혁론은
-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 그는 즉위 초부터 문풍이 세도(世道)를 반영한다는 전제 아래 문풍쇄신을 통한
- 세도의 광정(匡正)을 추구하였습니다.
- 하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내건 것은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술수이자
- 탕평책의 구체적인 장치였다고 이해가 됩니다.
Ⅸ. 탕평책과 인재등용
- 그는 학문적으로도 육경(六經) 중심의 남인학파와 친밀했을 뿐 아니라
-예론(禮論)에 있어서도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를 주장해 왕권 우위의
- 보수적 사고를 지닌 남인학파 내지 남인정파와 밀착될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었습니다.
- 그러나 [천하동례(天下同禮)]를 주창하면서 신권(臣權)을 주장하는 노론 중에서도
- 진보주의적인 젊은 자제들은 북학사상(北學思想)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 그의 학자적 소양은 이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 그리하여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신설하고 북학파의 종장(宗匠)인
-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 즉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 등을 등용해 그 사상을 수용하였습니다.
Ⅹ. 인재등용과 신분타파
- 그런데 검서관들의 신분은 서얼로서, 영조 때부터 탕평책의 이념에 편승해서
- [서얼통청운동(庶蘖通淸運動)]이라는 신분상승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 그러므로 이들의 임용은 서얼통청이라는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조처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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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는 이와 같이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있게 장려해 문운(文運)을 진작시켜나갔습니다.
- 한편으로는 문화의 저변확산을 꾀해 중인(中人) 이하 계층의 위항문학(委巷文學)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 여기에서 인왕산을 중심으로 경아전(京衙典)이 주축이 된 중인 이하 계층의 위항인(委巷人)들이
- 귀족문학으로 성립되어온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해 그들만의 [옥계시사(玉溪詩社)]를 결성하고
- 공동시집인 『풍요속선(風謠續選)』을 발간하는 등 성관(盛觀)을 이루어 중인문화의 원동력이 되고
- 뒷날 [필운대풍월(弼雲臺風月)]의 효시를 보게도 되었습니다.
Ⅺ. 정조시대의 문예부흥기
- 정조대의 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일컫기도 합니다.
- 문예부흥이 가능했던 배경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의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 조선중화의식(朝鮮中華意識)이 고취되고, 이에 따른 북벌론(北伐論)의 대의명분 아래
- 조선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한 예치(禮治)의 실현이라는 당면과제를 국민상하가 일치단결해
- 수행해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자긍심과 조선문화의 독자적 발전에 있었습니다.
- 이러한 조선의 고유문화현상 경향은 18세기 전반에 문화의 제반 분야에서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 이를테면 그림에서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국화풍(國畫風)]
- 글씨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국서풍(國書風)]이 그것입니다.
- 이는 조선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 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바로 이러한 축적 위에
-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 이른바 조선 후기의 도미적성관(掉尾的盛觀)으로 파악되는 황금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Ⅻ. 정조의 업적
1.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 등
-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이 대종을 이루지만, 이 밖에도 『일성록(日省錄)』의 편수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 장용영(壯勇營)의 설치, 형정(刑政)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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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의 폐지, 『자휼전칙(字恤典則)』의 반포,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의 공포
-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의 폐지, 천세력(千歲曆)의 제정 및 보급, 통공정책(通共政策)의 실시
- 등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2. 서학의 인정
- 당시 정치문제였던 서학(西學)에 대해 정학(正學)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 유연하게 대처한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3.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로 추존
- 정조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예우문제에도 고심하였습니다.
- 외조부 홍봉한(洪鳳漢)이 노론 세도가로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었지만,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해
- 사면해야 하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 그리고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추존하였습니다.(고종 때 장조로 추존됨)
4. 현륭원 및 수원화성 축조
- 또한 양주 배봉산(拜峰山) 아래에 있던 장헌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해서
- 현륭원(顯隆園)이라고 하였으며, 용주사(龍珠寺)를 세워 원찰(願刹)로 삼았습니다.
-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도를
-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으로 완수하였습니다.
- 옛 수원 관아가 있던 화산에 현륭원을 조성하면서 대신 팔달산 기슭에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고
- 어머니의 회갑연을 화성 행궁에서 열었습니다.
- 권신(權臣)들의 뿌리가 강고한 서울에서 벗어나 신도시 수원을 중심으로 한
- 새로운 정치적 구상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5.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김
- 왕의 말을 [교(敎: 가르침)]로 표현한 데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왕은 통치자 일뿐만 아니라
- 몸소 실천해 모범을 보여 큰 스승이 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였습니다.
- 조선이 성리학이념을 채택하고 [우문정치(右文政治)]로 표현되는 문화정치를 표방한 지
- 400년 만에 명실상부한 전형적인 학자군주가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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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습니다.
- 180권 100책 10갑에 달하는 그의 문집이 『홍재전서(弘齋全書)』로 간행된 것입니다.
- 이러한 학문적 토대가 있었기에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부하고
- 신하들을 영도할 수 있었습니다.
- 학문을 숭상하는 시대에 탁월한 학문적 능력으로 군사의 위상을 확보하여 문화국가를 통치한 것입니다.
13. 정조의 상훈과 추모
- 1800년 6월에 49세의 나이로 죽자 그의 유언대로 융릉 동쪽 언덕에 묻혔다가
- 그의 비 효의왕후가 죽으면서(1821) 현륭원 서쪽 언덕에 합장되어 오늘날의 건릉(健陵)이 되었습니다.
-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입니다.
-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1899년에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宣皇帝)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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